5월2일 일요일
"신지명사십리(薪智鳴沙十里) 해수욕장은 해수에 포함된 미네랄 등 기능성 성분이 전국에서 가장 풍부한 남해안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그 규모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매우 빼어난 곳이다. 모래 우는 소리가 십리밖까지 들린다 하여 『울모래』또는『명사십리』로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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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 진입로에서 찍은 전경
828년(흥덕왕 3)에 장보고(張保皐)가 전라남도 완도 지역에 설치한 군사 · 무역 거점이다.
장보고는 중국의 해적이 신라인을 잡아 노예로 삼는 현실을 목도한 후, 신라로 돌아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방어할 것을 건의하였다.
흥덕왕의 승낙을 받은 장보고는 1만 명의 변민(邊民)을 규합하여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 설치 후 장보고는 신라 서남해 지역의 해적을 소탕하였고, 적극적으로 대외무역에 참여하였다.
장보고는 당나라에는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라는 명칭으로 교역단을 파견하였고,
교관선(交關船)이라 명명된 무역선을 통해 교역하였다. 장보고는 당 · 신라 · 일본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의 일환인 중계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그는 청해진을 근거지로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일본과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했다. 청해진은 일종의 해상왕국이었다.
축적된 부와 군사력으로 장보고는 중앙정부의 권력전에도 관여하여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딸을 문성왕의 차비로 들이려고 한 시도가 진골귀족의 반대로 무산되자 장보고는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고,
846년 자객 염장에게 살해당했다.
그뒤 청해진은 무역 활동이 이어졌으나 851년에 철폐되었다.
청해진의 위치는 완도 본도에서 170m 정도 떨어진 장도인데, 섬 둘레를 외성과 내성으로 축성한 흔적과 목책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었다."
청치에 개입하지 말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우리나라 무역이 더 발달되지 않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란...
완도 수목원 사진은 2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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