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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만 즐겁게 살자.
나들이 길

수원화성을 다녀오다

by 미소.. 2014. 4. 28.

"조선 성곽 건축의 꽃,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부친의 원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후

1796년9월 완공된 성.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으며...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습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습니다."

 

일요일 오후 가족들과 수원화성 으로...

동북각루는 벽성의 서북 19보 용연(龍淵)의 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리를 내려가 용두(龍頭)에서 그치고서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렸다. 용두란 것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방화수류정(동북각루)

 

 

 

장안문[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은 성의 북문이다. 행궁의 왼쪽 편인데 동쪽으로 780보되는 곳에 사좌(巳坐) 해향(亥向)으로 앉았다.

문의 안과 밖은 홍예로 되어 있다.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척 2촌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 너비 16척 2 촌,

전체 두께는 40척이다. 안쪽의 좌우에 있는 무사(武砂)[성석이 크고 잘 다듬어진 것으로 문 옆의 석면(石面)이...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북치(北雉) 위에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벽돌로 삼면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둔다.그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를 만들고 나무 사닥다리를 사용하며, 위아래에 공안(空眼)을 많이 뚫어서 바깥을 엿보는데 편리하게 한다. 불랑기(佛狼機)

백자총(百子銃)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수원시내를 내려다 보고

 멀리 광교산도...

 

 

 

 

 

 

 

 

 서남암문은 서암문의 남쪽 367보 되는 곳에 있는데 용도(甬道)가 실지로 시작되는 곳이고 화양루의 통로가 된다.

벽돌로 된 홍예는 안쪽의 너비가 7척 높이가 8척 5촌이고 바깥 너비 6척 높이 8척이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鋪舍)이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있어 높은 곳에 의거해서 멀리까지 볼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두어서

경보를 알리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집의 제도.. 

 

 

 서남각루를 지나 팔달문으로...

 지중시장에서 저녁을 먹고...

 지중시장에서 유명한 순대볶음으로 저녁을 먹고 나오니 비가 제법 내린다.

 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정조20) 7월 16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화성의 포루는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공심돈과 같이 안을 비워 적을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하였다. 

 

 

 

 

 

사진에 다 담을수도 없어 몇장만 핸폰으로 찍어왔다...성을 한바퀴 돌아 원점으로...